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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6주년, 골목의 역사를 만나다] 그날을 기억하오 ‘정동’

이슈&피플 입력 2021-11-20 09:00:00 박진관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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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경제 정보를 정확하고 빠르게 제공해 온 서울경제TV는 2021년 광복 제76주년을 맞이해서, 마치 우리 주변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가볍게 지나쳐 온 역사적 유적과 유물에 대해 ‘아카이브 기획 취재’를 통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과거의 흔적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봄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문화적인 성과들이 험난했던 그때를 살았던 선조들의 의지와 극복 과정이 없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음을, 자라나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이번 기획 취재는 임진왜란과 구한말 혼란기,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반드시 영광스럽지만은 않은 유적과 유물일지라도 역사적 고초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에 간직되어 온 아픈 흔적들조차 끌어내고 보존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려 합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족보다 오히려 가깝게 지내는 이웃이 더 소중히 느껴질 때가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힐 수밖에 없게 되고, ‘아픔’이 담긴 유물이라는 이유로 관리가 소홀해진다면 자칫 그 과오는 반복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간도, 연해주, 사할린으로 쫓기듯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징병과 위안의 이름으로 꽃다운 청춘을 버려야 했던 아들과 딸들, 삭풍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나라와 가족을 꿋꿋이 지켜내 온 우리 민족의 강인한 흔적들, 그리고 이역만리 100년의 시간을 돌아,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라에 다시 둥지를 튼 골목의 고려인 식당들 모두가 우리 민족이 간직해야 할 아픔과 영광의 역사들입니다. <편집자주>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이 작은 동네에서 대한민국의 역사가 수십 번 새로이 쓰였다. 이성계의 사랑과 고종의 야망, 명성황후의 최후와 김소월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는 곳. 비통함의 눈물로 얼룩졌던 서울의 정동을 다시 걸어본다.
 

1396년,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가 생을 달리했다. 신덕왕후는 이성계가 고려말 장군 시절 만났던 권문세족의 자제로 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가 정치 영역을 넓히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태조가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때 행정구역상 한성부 서쪽의 황화방에 속했던 정동은 명문 귀족들의 저택이 대거 자리한 동네였다. 조선시대의 문신 김종서, 이황, 심의겸 등의 저택도 지금의 정동에 있었다고 한다.


정동에 있는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후손의 집이었던 것을 임진왜란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선조가 행궁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후에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창덕궁으로 옮겨갈 때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그때 처음 얻게 된다.


고종대에는 러시아 영사관에서의 생활(아관파천)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1897년, 1900년, 1902년, 1904년에 걸쳐 본격적인 궁궐의 모습을 갖춰가게 되었고 1907년 고종이 현재의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경운궁 즉 덕수궁은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임시 궁궐의 성격이 상당히 강했고 동시에 외관만 두고 보더라도 역사의 부침을 읽어내기에 충분한 것이,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으나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규모는 가장 작으며 전체적인 배치가 정연하진 못하다.


19세기에는 아름다운 궁궐과 빈민촌락이 묘하게 얽혀 있던 정동. 이곳에서 고종은 새로운 대한제국을 꿈꿨다. 


1894년 일어난 청일전쟁. 청나라를 중요한 우방국으로 생각했던 명성황후는 가장 믿었던 大國 청나라가 패하자 또 다른 우호세력이 필요했고 러시아로 눈을 돌리게 된다. 러시아가 조선에 가까워지는 것을 지극히 경계했던 일본은 이듬해 1895년 건천궁에서 잔인하고 처참한 방식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인 아관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러시아는 이 기간 동안 산림채벌권, 광산채굴권, 철도부설권 등 많은 이권을 가져갔고 동시에 정부 각부마다 러시아 고문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러시아 입장에 기반한 정책들을 펼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관에 머무는 동안 고종이 생각을 정리할 때 걸었다는 길. 이 길을 걸으며 고종은 이 길의 끝에 반드시 대한제국의 독립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했을 것이다.


유럽의 어느 정원을 보는 듯한 우아한 근대 건물인 덕수궁 석조전. 1910년 대한제국기에 완공하여 접견실이자 황제의 침실, 거실, 서재 등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904년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러일전쟁. 일본은 미국, 영국의 지지를 얻어 승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으로 넘긴다는 을사늑약을 고종에게 강요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제안을 끝까지 거부했던 고종. 일본은 자신들에게 동조한 다섯 명의 대신들을 앞세워 황제의 도장이 없는 을사늑약을 중명전에서 체결한다.
 

미국 북감리교회에서 한국에 파견한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 1885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아펜젤러는 한국감리교회를 창설하고,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주시경, 서재필, 윤치호, 김소월 등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기록된 상당히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이곳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대체로 애통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서울 정동이지만 후대 대한민국을 꽃피울 희망도 이곳에서 피어난 것이다.

'경교장' 박상철 화백作

 

대한민국 역사 속의 눈물과 비극, 희망을 모두 품었던 정동. 시간이 한참 흘렀음에도 정동 곳곳에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들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과거의 그날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박진관 기자 nomadp@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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